
밀레는 대표적인 자연주의 화가이다. 프랑스의 작은 농촌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때부터 농촌을 깊이 관찰했다. 물론 처음부터 농촌을 주제로 작품활동은 한 것은 아니다. 초상화가로 시작하여 돈이 되는 누드화나 간판화등을 그렸다. 이후 살롱전 입상과 전시회를 통해 이름을 알려나가기 시작한다. 가난한 삶을 살았던 밀레는 서서히 명성을 얻기 시작해 풍족하진 않지만 부족하지도 않은 삶을 살게 된다. 이후에 밀레는 전격적으로 자연주의 화가의 길을 걷게 된다. 또한 프랑스의 작은 마을 바르비종으로 터전을 옮긴 후에는 바르비종파로 활동한다. 풍경화가 주를 이루었던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들과는 다소 다른 점이 밀레의 그림에는 인물이 보인다는 것이다. 그의 그림은 농촌을 풍경으로 자신의 일을 묵묵히 하고 있는 농민들이 주로 등장한다. 그 중 '키질하는 사람'이라는 작품이 있다. 당시 프랑스 사회는 2월 혁명으로 농민을 비롯한 노동자 계층의 권리가 신장되고 있던 시기였다. 일부 부르주아 계급들에게만 주어졌던 정치권이 2월 혁명을 기점으로 농민들에게도 주어진 것이다. 이후 종교에 대한 불만과도 합쳐진 시대 상황과 밀레의 그림은 잘 맞아들었고 큰 주목을 받게 된다. 종교계의 위상이 점차 하락하고 종교화 역시 대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 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고있는 농민의 모습이 마치 숭고한 임무를 수행하는 종교화 속의 인물들과 매치되면서, 종교화의 자리를 넘볼 수 있었다.

밀레의 대표작이라 하면 '이삭줍기'와 '만종'을 들 수가 있는데, 이 역시 농촌을 배경으로 했으며 19세기 말부터 꽤나 유명해 졌다. 앞서 말했듯이 당시 프랑스는 몇 차례 혁명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다. 이에 농촌을 배경으로 한 밀레의 그림은 프랑스인들에게 편온함을 찾아주어 크게 인기를 끌게 된다. 당시 사회에 대해 자세히 말해보자면, 19세기 말 전 세계 열강들은 제국주의를 토대로 땅따먹기에 혈안이었다. 프랑스 역시 개척의 선두주자로서 전 세계 지도를 휘젓고 다녔는데 프랑스의 식민지에 프랑스 문화가 스며드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프랑스의 문화가 곧 전 세계의 문화라는 인식이 자리잡게 되었고, 당시 인기였던 밀레의 그림이 전 세계적 인기를 끌게 된 것이었다. 단지 '시대적 상황이 잘 맞아떨어져 밀레가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조금만 생각해보면 당시 활동했던 화가들이 모두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 역사에 이름은 남긴 모두가 그렇듯이 시대를 잘 타고난 위인은 드물다. 밀레 역시 젊은 시절 프랑스 사회에 의해 작품이 검열당하기도 했고 혼란스러운 혁명시기를 겪기도 했다. 하지만 혼란스러운 시대상황에서도 본인의 실력을 발휘하고, 종래에는 급변하는 사회 덕분에 성공했다. 이것을 단지 '운'이라기 보다는 실력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밀레의 성공을 보면 '진인사 대천명'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자신의 자리에서 자신의 할 일을 묵묵히 해나가는 농민, 자신의 그림에 등장하는 농민은 밀레 자신이었을 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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